뮤지컬 요덕스토리가 새롭게 단장하여 선을 보인다고 한다. 아래와 같은
소개글을 보니 옛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될 모양이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공화국 사나이들의
감동스런 우정과 의리,
사랑을 전제로 한 배신과 복수, 그리고 용서의
아리아,
천상의 하모니가 만들어내는 요덕의 뮤직 넘버,
미국을 감동시킨
토종 창작 뮤지컬의 화려한 변신,
요덕과 탱크, 그리고 사랑 앞에
주저 앉는 폭력,
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의 장점들을 뛰어넘는 작품성,
북한 구원의 희망의 메시지…
사실 옛
요덕스토리는 고발성 강한 작품이었는데, 러브스토리를 첫머리에 내세우는 요덕스토리는 어떤 모습일까? 4년
전쯤 요덕스토리를 보고 썼던 평을 가져와 다시 읽어본다.
뮤지컬 요덕스토리
내 부모님이 그곳에
요덕스토리는 북한에 실제로 존재하는 관리소(정치범 수용소)를 다룬
뮤지컬이다. 요덕스토리는 내용 자체보다 함께 본 사람들과 그들의 반응이 더 내
마음을 잡았다. 북한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자신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경험이 있는 친구들, 가족이 현재 북한의 정치점 수용소에 갇혀 있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1부가 끝난 후 더 못 보겠다고 나가고
말았다. 미리 어떤 내용인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내 탓인 것 같아
참 미안했다. 그 친구 부모님이 거기에 계신 것과 그래서 안 보게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었는데 명단에 이름이 잘못 적혀있어서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옆에 앉은 고등학생 친구는 보는 내내 울었다. 이
친구에게도 같은 사연이 있는지(직계를 제외한 친척까지 따지면 전혀 관계없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그렇지 않더라도 북한에서의 경험과 여고생의 감수성이 그렇게 반응하게 했던
것 같다. 울지 않았던 친구들, 그저 재밌다고 말했던 남성동지들과 북한의 실제노래와
뮤지컬의 노래를 비교하는 친구도 같은 과정을 거쳤기 덕분이거나 건강하게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이미 굳어져 버린 마음 때문인 것을 안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직접
돕고 또 그 때문에 옥에 갇히거나 탈북자들과 같은 경로로 탈출하기도 했던
분들은 오히려 뮤지컬보다 '더 심하지'라며 얘기하신다. 그러나 더 심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뮤지컬에 포함시키기에는 관객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을 뿐더러 사람들이
믿지도 않기 때문이란다.

공화국
요덕에도 임하소서
"주기도문"을 개사한 노래의 가사가 마음에 꽂혔다. "아버지 남조선에만 임하지 마옵시고 공화국 요덕에도 임하소서. 일용할 양식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우리로 즉결심판대에 서지 않게 하시며 다만 수용소에서 구하옵소서." 또 기독교개종자이자 락음악에 심취하여 탈북하였던 리태식은 극 중간중간 부르짖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요즘 나의 기도제목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 내게, 이 가정에, 이 민족에, 열방에 임하소서. 그러나 내가 안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는 모습이 무엇인지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 역으로 알게 된 것도 있다. 무엇이 의(righteousness)이고 사랑인지는 분별하기 어렵지만 무엇이 의가 아니고 사랑이 아닌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요덕을 비롯한 정치범 수용소가 그와 같은 케이스이다.
정치범 수용소가 의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면 요즘
보수언론에서도 문제시되는 중국의 북한잠식은 다시 생각할 여지가 있다. 북한과 남한이 통일하는
것이 북한주민들에게 최상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만 해도 그렇다. 중국이 아무
말 없이 북한에 퍼주고 소비재와 에너지, 기간산업을 통틀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히 우려하면서 여전히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인도적 대북 지원을 퍼주기와
살인정권유지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통일이 되고 나면 다를까? 많은 청장년들이 우려하는
통일비용부담은 통일 이후에는 구체적인 불만으로 표출되지 않을까? 오히려 중국의 동북 4성에
편입되는 것이 북한주민들에게 더 맘 편한 길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곳에도 생명이 나는 것은
당간부였던 아버지의 간첩혐의로 함께 요덕에 잡혀간 공훈배우(는 북한에서 봉급기준으로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강련화가 수용소장에게 강간을 당해 아이를 낳는다. 감자를 훔쳐 먹었다고
해서 손을 자르는 곳, 탈출시도시 즉결처형되는 곳, 옥수수죽과 소금 한 숟갈로
중노동을 강요받는 곳에서.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인가. 꼭 요덕이 아니어도 그렇다.
저 북한 땅에 지금 이 순간에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묻지만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세상에 어찌 생명이 계속 태어나게 하시느냐고 묻고 싶다. 배고프고
자유도 없는 북한 땅에도, 23년간 내전이 지속된 아프리카 수단에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도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이런 세상에 생명을 낳는가라는 질문은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
옳다. 사람들은 최악의 비참한 현실에도 아이낳기를 그치지 않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먹고
살기가 나아질수록 아이낳기를 꺼린다. 고난 중에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배가 부를수록 정작 중요한 것, 지켜할 것이
무엇인지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나 역시 요덕수용소에서
태어난 '요덕'이에게서 희망을 본다. 그 땅에도 여전히 생명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그 땅을 지켜보고 그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증거인 것만 같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할지 모르겠지만 뮤지컬에서 암시된 대로
요덕에서 사람들이 채찍 맞을 때 예수도 십자가에서 채찍 맞으며 손이 잘려
나갈 때 예수의 손목 한 복판에도 대못이 박히고 있다.